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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의 역사

개항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중구, 인천중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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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이야기

용수동 차(車)부자의 전설 용수동 차(車)부자의 전설

영종도 용수동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마을 농민들이 모두 이 물로 농사지었다.

이 연못은 이 마을 차부자의 것이었다. 차씨는 부자였으나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하루는 떠돌이 중이 이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시주할 것을 빌며 염불하였는데 한참 후에 야 차씨가 나와 중보고 호통을 치며 시주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중이 말하기를 '그러면 물이라도 한그릇 달라'고 하였더니 차씨는 쇠죽을 쑤는 바가지를 주며 '저 아래 우물이 있으니 가서 떠 먹어라'는 것이었다.

중은 우물에 가서 물을 떠먹는 시늉만 하고는 돌아 와서 차씨에게 쇠죽쑤는 바가지를 돌려주고는 '지금도 귀댁은 부자이지만 저기 보이는 연못을 메워 논을 만들면 더 큰 부자가 될것이다'하였다. 인색하고 구두쇠인 차씨는 그 중의 말에 '과연 그럴만 한 일이다'생각하고 인부를 시켜 연못을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연못속에서 살고있는 용이 먹구름을 타고 팔미도 쪽 바다로 날아갔다.

그후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나서 차씨집은 물에 휩쓸렸다.
결국 차부자는 망해버리고 마을 이름은 용수동이 되었다 한다.

선녀암의 사연 선녀암의사연

영종도에 한 때는 영종진 방어영을 두고, 군인이 상주하였다.

영종진영은 첨사, 첨제사방어사 등이 군을 통솔하였는데 참모는 호군이다.
어느 때 한 호군에게 어여쁜 소실(첩)이 있었는데 그는 차차 소실에게 정이 멀어져 그 소실은 슬퍼하여 자기 남자가 근무하는 영종 진영을 찾아가서 진영앞의 태평암이란 바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체를 찾는 사람이 없어 조수에 밀려 용유도 포구에 떠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그 시체가 호군의 소실임을 알고 건져다 묻어 주었다. 그 후로 태평암을 선녀암이라 불렀고, 용유도포구의 고개를 호군의 소실을 묻었다고 호군재라고 불렀다 한다.

거북바위에 얽힌 전설 거북바위에 얽힌 전설

왕산리 통개포구에는 커다란 넙적 바위를 지반으로 거북이와 흡사한 모습을 가진 큰 바위가 올라 앉아 있다.

왕산리 통개포구에는 커다란 넙적 바위를 지반으로 거북이와 흡사한 모습을 가진 큰 바위가 올라 앉아 있다.

이 바위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 바다쪽이면서도 연평도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고, 꼬리부분은 서풀 마을 삼현과 김해 김씨네 집안들이 살고 있는데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홍문이 있는 부분에 똥 자루가 달려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이 바위의 전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살고 있는 홍자 돌림자로부터 11대조 되는 선친이 영종도 서풀 신불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섬중에 섬으로 와 정착하게 된 이들은 밭을 개간하고 둑을 막아 논을 풀고 하여 가며 근근이 살아오다가 육대조에 내려와 字가 '형보'인 사람이 작고할 때, 낯선 손님 한사람이 지나다 들리어 '시장기가 들어 들렸노라'하여 상주는 초상집이지만 차려 놓은 음식과 술을 잘 대접하였다.그랬더니 다 먹고 난 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시장기가 들어 맥이 다 풀리던 중 대접을 잘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신세를 갚아야 도리인것 같으니 묏자리나 잡아 드리겠노라'하여 상주는 쾌히 승낙하고 그를 따라 산으로 올랐는데 이곳 저곳을 다니다 한 자리를 잡아주며 '방향은 을좌신향으로 잡아야 되며 이 방향이 바로 왕산이 통개포구에 있는 거북바위를 향하여 안을 잡으면 거북은 황해바다 고기떼를 듬뿍 먹고 이곳을 향하여 똥을 누는 형국이니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이만하면 후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리다'하며 설명해 주었다.

상주는 너무나 고마워 며칠 묵어가라 권유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그 길손은 갔다. 상주는 그가 가르쳐 준대로 장례를 치르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 가던 중 홍자 돌림자 조부 항렬의 깁종우 할아버지때 외국에서 온 광산 기술이 있는 분들이 영종도에 와서 시굴을 하여본 결과 질좋은 금이 상당량이 매장되었음을 발견하고 광권허가를 받아 금광이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김종우, 종현, 달현, 동일, 등이 그 광업에 뛰어 들어 대부가 되어 김종현, 김달현같은 형제들은 문화사업은 물론 도서민들의 생활에 고통을 알고 다소나마 편리하게 다닐 수 있도록 自費로 돌다리를 놓아주는 등 많은 자선 사업을 한 서풀, 삼목, 용유 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어 후세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왕산리 통개포구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거북바위는 삼현파 김해김씨를 위하여 생긴 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어망에 걸린 돌부처 어망에 걸린 돌부처

옛날 영종도 운묵마을 예단포에 어민 손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연평도에 출항해서 조기잡이를 했는데 때마침 그물에서 돌부처가 걸려 나왔다.

그래서 그는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 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는데 조기는 잡히지 않고 역시 돌부처가 다시 걸려 들었다. 이번 에도 "재수없구나."하고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날 밤이었다. 손씨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 돌부처가 또다시 걸릴 것이니 그 돌부처를 영종도 구읍 태평암에 안치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아니나 다를까 그물을 올리니 과연 그 돌부처가 그물에 걸려 나왔기에 꿈의 현몽대로 태평암에 세워 놓았다.
그 후 영종도 방어영 군졸들이 이 돌부처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고 활로 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때 돌부처의 한쪽 팔에는 약병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군졸들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운사 주지는 이곳에 나타나 그 돌부처를 절로 모셔 갔다.

그로부터 백운사에는 돌부처에 기도하는 신도들이 매일 수없이 모여 들었다. 또 돌부처에 기원하면 모두가 소원성취하였다.
그리고 이절을 지나야 할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공손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돌부처가 오래도록 백운사에 안치되었다가 일정때 주지 김모가 어느 중에게 팔았다고 전해올 뿐 행방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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